예수 그리스도

지옥에서 온 이웃

Jesus Never Existed – Imaginary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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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eth Humphreys

 


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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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학대

돼지들을 자살로 몰아넣은 예수 - 당신의 애완 동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가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마가복음(5장 13절)

 

 

 

과일 나무 덤불 –예수 해충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잘 속아넘어가는 예수

예수를 이웃으로 두면 바베큐 파티 때 매우 유용할 수가 있다. (정어리 몇 마리와 베글 몇 조각만 있어도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다)

그러나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들은 질병이 귀신이 들려서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엑소시스트(The Exorcist영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

본이 되어야 할 예수는 비판적 사고를 억제시키고 인기있는 경신(輕信)을 증진시키므로서 인류에게 해악을 끼쳐왔다.

이천 년간의 기독교 역사가 비극적으로 보여주듯이, 비이성적이고 몽상적 믿음을 증진시킴으로서 사람들을, 특히 단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젊은이들을, 사기꾼과 협잡꾼들의 먹이가 되게했다.

 

 

 

 

 

가족간의 불화

당신의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신이 그 일당의 일원이 되기 전에 가족을 혐오하라고 권고한다.

예수는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나, 음식에 대한 실제 습관, 그리고 종교적 관습의 준수를 비웃으며 아내와 자식을 버리라고 뇌물까지 제공한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라라”

– 마태복음 (19장29절)

 

 

 

예수 광(狂)들은 무장했을 수도 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누가복음 (22장36절)

 

 

 


예수를 위한 선한 매질

채찍질 고행자는 기독교 역사상 반복해서 나타난다. 특히 악명 높은 것은 13세기 역병이 창궐하던 이태리에서 탁발승 파사니(Raniero Fasani) 가 주도하던 "Disciplinata di Gesu Cristo"이었다.

환자는 허리까지 웃통을 벗은다음 자신의 등짝을 피가 흘러 내릴 때까지 채찍질한다. 이것이 역병의 치료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 – 전천후 스퍼맨

 

 

 

 

 

요상한 변태?

사람이거나, 신이거나, 혹은 가공인물이거나 관계 없이 왜 예수는 자신의 발을 여자의 머리채로 닦게 했을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 요한복음(12장 3절)

 

 

 

 

 

 

 

예수 – 그는 동성연애자 였나?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마가복음(14장 45절)

예수는 만찬장에서 발을 씻기는 취향이 있다. 그는 또 반쯤 벗은 듯한 옷을 입은 남성 구애자가 있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루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 마가복음(14장 51절, 52절)

예수는 수 백 가지의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지만 동성애는 그 중에 끼어 있지 않다. 아마도 “마가의 비밀복음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그러나 청년은 그를 바라보고 사랑하며 그가 그와 함께 하기를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청년은 부유했으므로, 그들은 무덤을 나와 그 청년의 집으로 갔다. 엿새 후 예수는 그에게 그가 할 것을 말했다. 저녁시간에 그 청년은 그의 벌거벗은 몸에 아마포 옷을 걸치고 그에게로 왔다. 그날 밤 그는 그와 함께 머물렀고 예수는 그에게 신의 왕국의 신비를 가르쳤다.”
– 마가의 비밀복음서(Secret Gospel of Mark)

 

 

“장발은 창피한 일”이라고?! 성 바울이 말씀하신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고린도 전서 (11장 14절)

 

 

 

 

 

히피식 생활 습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말라” - 마태복음 (6장 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마태복음 (6장 25절)

 

추측컨대 학교나 쇼핑 몰은 예외인 모양이다.

 

 

 

 

 

 

예수는 얌전한 체 하는 여자를 참지 못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가든 빼어 내버리라….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 마태복음 (5장 28절-30절)

여기를 보면 예수가 정말로 심히 비위가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는 단지 이상한 욕정의 생각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되거나 팔병신이 되라고 강권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아름다운 여인을 찬미하는 것이 무에 그리 나쁜가? 예수는 중성인가?

 

 

 

예수는 여성 혐오자 인가?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노니, “여자는 살아야 할 가치가 없는 존재이니 마리아를 우리 가운데서 떠나 보내자.
예수 가라사대, “ 보라, 내가 그녀를 인도하여 그녀가 남자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그녀도 너희 남자들과 같이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리라. 남자가 된 모든 여자들도 천국에 갈 것이니라”.
– 도마 복음(Gospel of Thomas 114)


우리가 도마복음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예수가 당시 사회에서 종속적 존재로서의 여자의 위치를 의문의 여지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예수가 공화당원이라고?

예수의 공평성에 대한 감각은 의문스럽다. 그는 부자는 더 부자가 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마태복음 (13장12절)

 

 

 

 

 

 

 

예수가 공산주의자?!

다시한번, 예수는 부자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양도하라고 권고한다.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마태복음 (19장 21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태복음 (6장 19절) (목사에게 맡기면 틀림 없다: 역자 주)


이것은 정확히 자본주의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저 아름답게 지은 부자 교회들은 어떤가? (이 것들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역자 주) 나에겐 이 것들이 빨갱이 소리로 들린다.
실제로 노자와 부처가 예수보다 600년 먼저 이와 비슷한 실현성 없는, 진부한 소리를 지껄였다.

 

 



 

심판자 예수는 심판하지 않는다! 변호사의 낭패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한복음(5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요한복음(9장 39절)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8장 15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2장 47절).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누가복음(6장 37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나?! : 역자 주)

 

지극히 괴로운 청교도

“복음서에서 예수는, 순결을 제외하면, 자신이 위반하지 않은 단 한가지 감상도 말한 일이 없다...

그는 사회생활에서 발생되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단 한마디의 지도적인 말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곧 종말이 올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교도들의 원형(原型)이다: 인생에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경멸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모질고 공정하지 않으며, 참으로 실제적이지 않으며 –그의 많은 조언들은 좀 바보같기도 하다. 우리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가 그 어떤 효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맹랑하다”.
– 맥케이브(Joseph McCabe (Did Jesus Ever Live?))
 

 

 


기독교-그 궁극적 정의

“자신이 자신의 아버지도 되는 우주적인 유대인 좀비가, 당신이 그의 살을 상징적으로 먹고 텔레파시를 이용하여 그에게 그를 당신의 주님이요 주인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뱀으로부터 마법의 나무열매를 먹도록 꾀임받은갈비뼈로 부터 나온 여인으로 인해 온 인류에 현존하는 마귀의 힘을 당신의 영혼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도록 하면, 당신을 영원히 살게 할 수 있다는 믿음” (혼란 스럽다고요? 원래 기독교가 그런 것이다: 역자주)
– 그루스(Joel Grus (Your Religion is False))
좀비(서아프리카 원주민이 받드는 신, 죽은 자를 살려내는 능력, 혹은 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 역자 주)

 

 

 

 

예수 그리스도 –덕(德)의 전형(典型)인가

그러나 개신교도들 또한 마녀 화형과 이단자 색출 처벌, 그리고 야만인 토착민들에 대한 학살 또는 캐톨릭 교도들 까지 살육하는 데에 그 누구 못지 않았다는 점도 잊지 말자.

모든 입맛과 색갈의 기독교도들의 일반적 변명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실패가 아닌 인간 자신들의 실패라는 것이다. 이 신인(神人)은 완벽하고 순수하며, 원단(原緞)에서 잘라온 그의 가르침은 100% 달콤하고 경쾌하다는 것이다.

이 초대형의 완전무결한 왕자님에게 당신의 여생을 영구히 거는 데에 서명하기 전에 그 사람이 당신의 이웃이 된다면 어떤 이웃일까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시라.

 

이런 이웃은 어떤가. 예수는 일당의 무직자 젊은이들과 요상한 창녀들을 데리고 흥청거린다. 그들 중 일부는 이 “서로 사랑하는” 깽단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버렸다

“저희가…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누가복음(5장 11절)

 

걸어다니고, 말하는 모순(矛盾) 덩어리

만일 예수(이야기)가 한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성품은 일관성이 있고 믿음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이 신인(神人)은 모순덩어리가 되어버렸다. 특히 그의 신성(神性)의 문제에서는 악명이 높다.

이 특급 영웅은 신인가? 이는 적어도 4세기의 아리우스(Arius)시대 이후부터 그리스도 추종자들의 피를 흘리게 한 문제였다. 어린 아이들 조차도 이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에 대한 다량의 인용을 모을 수 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로부터 마태복음 27장 46절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까지)

그러나 유대 경전에서 뽑아낸 잡다한 일화와 격언집으로부터 추출해 낸 인물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예수를 완전하게 하는가?

모든 종류의 기독교인들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에 관계없이, 그들의 영웅이 “완전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완전한 땀을 흘리는가 아니면 땀을 전혀 흘리지 않는가? 누구나 반드시 복음서로부터 많은 “사랑”의 가르침들을 굴려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선택적인 작업이고 그것들 중 이미 다른 곳에서, 즉 인간 철학자들이 이미 말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완결성”은 모든 가르침과 행동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수퍼스타의 행동과 말을 자세히 관찰하면 우리는 덕(德)의 전형(典型)을 발견할 수 없다.

 

이교도들이 더 잘 안다

“불의(不義)는 죄다. 자연은 그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성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이들의 동료들을 그 가치에 따라 서로 돕고 결코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그들의 비난 혹은 악의를 당신을 향해 분출 시킬 때 혹은 (당신에게) 다른 어떤 종류의 상처를 주는 소리를 떠들때… 그들에 대해 친절한 생각을 갖는 것이 당신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그들을 당신의 친구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 아니다. 로마 황제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61-180))가 그의 명상('Meditations')에서 한 말이다. 이 이교도는 자신의 일생을 로마문명을 방어하는데 바쳤다.

그는 로마의 불운을 고소해 하는 기독교 광신자들을 혐오했다.

 

불화와 투쟁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인공적 구조물이다. 이 평화의 왕자는 또한 불화와 투쟁을 설교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 (10장 34절)


그의 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놀랍게도, 예수는 가족을 적으로 만들라고 말한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엄마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 (10장 35절, 3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장 26절)


예수가 이 심술궂은 (그리고 간단히 말해 어리석은)언명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마태가 그 답을 제공한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마태복음(10장 21절)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이 살인적인 허튼 수작으로 그들 자신들의 가족들과 소원(疎遠)하게 만든 다음 예수는 그의 찬미하는 일당들에게 자신들을 죄로 이끄는 신체 부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권고를 한다 –절단하라! 그들은 자신의 손을 자르거나 자신의 눈을 뽑아 냄으로서 자신을 병신을 만든다. 그는 지옥에서 영원한 불에 고통을 받는 것보다 불구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복음 (9장 43절-47절)


이 재앙을 가져오는 현자(賢者)에 따르면 단지 욕정을 품고 여자를 바라만 보아도 죄를 범한 셈이 되는 것이다. 3세기의 교부 오리겐(Origen)은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기독교 광신자였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조금 너무 문자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을 거세해 버렸다.(그는 쌍방을을 떼어 버렸단다: 역자 주) 그는 자신을 실추시키고 남용시키므로서 영광을 찾은 첫번 째 예수 추종자도 아니었고 마직막도 아니었다. 그 이후에 이어진 고행자들의 세기들에서 수만명의 형제들이 이 신인(神人)의 감상적인 지시에 따라 그들의 육신에 고행을 가했다.

사회적으로 극심하게 어렵거나 재앙이 닥친 시기에는 절망적인 신자들이 일반적 불운이나 개인적 비극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껴서 자발적으로 공개적인 애도와 자기의 등에 채찍으로 매질을 하는 것과 같은 반라적 격앙의 행동에 자신을 맡겨버린다. 참으로 영혼의 선을 위해 육체를 벌하는 것은 기독교도들의 정신병적인 주요 교의(敎義)로 남아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체적으로 위험하고, 가족을 위협하며 정신을 편벽되게하는 종교집단의 두목이다! 아직도 당신은 이런 수퍼스타를 이웃으로 두고 싶은가?

 

이교도들이 더 잘 안다

포르피리(Porphyry (232-305))는 기독교도들의 네메시스(벌을 주는 사람)였다. 기독교도들은 수세대에 걸쳐 그를 논박했고 마침내 그의 책을 태워버림으로 논쟁을 끝냈다.

“선생의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네가 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너는 너 자신속의 삶이 없다’

이 말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허무맹랑하다; 이것은 허무맹랑함 그 자체보다 더욱 허무맹랑하며 그 어떤 짐승보다 더 짐승같다: 사람이 사람의 고기 맛을 보고 피를 마신다는 것..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영생을 얻는다는 생각!

말하라: 이런 류의 행동을 권고 하므로서 당신은 인간의 존재를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야만성으로 격하시키지 않는가?”

– 포르피리 Porphyry Against the Christians (Hoffmann, p49).


예수 – 동물과 식물에 위험한 존재

이 거라사인의 돼지(마가복음 5장)들이 그런 운명에 처해졌어야 마땅할까? 그리고 이 돼지들을 키워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은 그 손해를 어떻게 감당할까? 이 미스터 전능(全能)씨는 (마음만 먹는다면) ‘더러운 귀신들’을 한방에 연기로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예수는 그렇게 하는 대신 대단위의 동물학대를 택한다.

-예수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을 집어 넣을지도 모르니까 당신의 개나 고양이를 주의해서 지키시라.

(그러나 물론 “동물 학대죄”는 이 이야기들을 실제로 쓴 서기관들에게는 문제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철이 아니어서 과일이 없다는 이유로 과일나무를 저주한다?! 왜 그냥 무화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 마가복음 (11장 14절, 22절)

-예수가 말라버리게 할지 모르니 당신의 과일나무 덤불들도 잘 살펴 지키시라.

 

예수 – 정직하지 못함을 칭찬하다.

누가복음 16장에는 소위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온다. – 예수는 한 부자가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를 인정해 주며 칭찬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청지기는 자신의 낭비로 인해 책망을 받으며 해고될 지경을 당하자 그의 미래를 보장할 전략을 꾸며낸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집으로 영접하리라” -누가복음 (16장4절)

여기저 ‘저희’는 이 부자 주인들로부터 빚을 진 사람들이다. 이 청지기는 이들 빚쟁이들의 빚을 탕감해준다. 그럼에도 명백하게:

“주인이 이 옳지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음으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누가복음 (16장 8절)


미스터 “완벽” 예수는 덧붙여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누가복음(16장 9절)


휴~! –이것은 정말 산데이 스쿨에서 가리킬 것은 아니네! 그러나 예수는 정직하지 못함을 칭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부정직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와 그의 일당이 갈릴리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을 때 한 들뜬 사람이 그의 보스에게 초막절에 유대인들 앞에서 기적을 베풀어 보라고 강청한다. 예수는 이 청을 거부한다: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7장8절)

추종자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이 수퍼맨은 자신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 일을 정확히 하고 있다: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요한복음 (7장 10절)

 

예수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가족의 분열, 신체 절단, 돼지들의 운명, 그리고 (재수 없이 당한) 무화과 나무 후에 이 미스터 ‘사랑과 친절’에게 참으로 어떤 동정심이 있을까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는 정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나? 참으로 괴상하게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린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8장 22절)

이것은 방금 아버지를 여읜 제자가 예수에게 아버지 장사를 지낼 말미를 요청하자 그에게 한 말이다. 아무리 마음이 단단히 굳어있는 피고용자라도 고용인에게 부친의 장사를 지낼 시간은 허용하는 법이다!

무심한 예수는 그의 (죽은자를)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좀 더 인상깊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나사로를 그의 무덤에서 나흘동안을 누어있게 방치했다.

또 다른 사건에서 재수 나쁜 가룟 유다는 비싼 향유( 300 데나리온 어치의 나드 한 근. 이 돈의 액수는 일년치 봉급에 해당한다)를 그의 발에 (여인의 머리채를 사용하여) 비비도록 하느냐고 묻는다. 유다는 이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써야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금권주의자들을 항상 즐겁게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며 예수는 말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장8절)


헤이, 우리도 그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가난의 문제에 대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가?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이었고 초기교회는 이 불신의 족속들로 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우렸다. 예수 자신이 반 유대 주의자인가? 확실히 예수는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의 족속이 아닌양, 자신을 그들과 분리시키고 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8장 12절)


여기서 ‘자손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추측해 보라. 유대인들에게 언제 기회가 있었는가?

이 “위대한 도덕교사”는 노예제도를 비난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점을 주목하시라. 인류의 구원자 치고는 대단한 단점이다. 폭정과 노예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신의 뜻 (행복은 죽은 후에 천당에서 누릴 수 있다)이라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참을 수 없이 부도덕하다.

 

이교도들이 더 잘 안다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동물들에게, 단지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생을 거절하는 것은 건강하디 못하다…식물들도, 그들도 삶이 있다. 그리고 이 삶들이 선을 가져올 수도 있고 악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 식물들이 번성할 수도 있고 말라버릴 수도 있다. 혹은 과일을 많이 열게 할 수도 있고 전혀 맺지 못할 수도 있다…

식물들이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생물들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삶에 기초하여 생각해 보자… 행복은 삶을 전적으로 사는 존재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최대의 풍족함 안에서의 삶, 그안에 선이 불가결한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그것 없이 가져올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닌 그런 삶, 선안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 어떤 이질적인 영역에서 이질적인 물질들을 차출할 필요가 없는 삶.

사람이 단지 감각적 삶 뿐 아니라 이성과 진정한 지적사고를 지배할 수 있을 때 그는 완전한 삶을 실현한다.

우리가 행복을 구성하기 위해 견지하고있는 이것을 잠재적으로나 혹은 효과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만일 그로부터 그의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을데려가 버린 죽음이 그에게 슬픔을 가져온다면 이는 그에게가 아니고, 진정한 인간에게가 아니고, 그의 안에서 지고의 존재로부터 떨어져 서 있는, 그가 참여하지 않은 그 비탄을 가진 저급한 사람에게 이다.


–  플로티누스 Plotinus (204-270), The Six Enneads. 플로티느스는 마지막의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겸손인가 교만인가?

예수의 완전성은 그의 무한한 ‘겸손’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우리 모두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 암을 고치는 일이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일과 같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안다,

정말 부탁인데, 당신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안락함을 떠나서 수년간 갈릴리 촌 구석의 목수로서 험한 지구상의 생활로 떠나온 장엄한 수퍼스타를 믿겠는가? 약간은 위탁금을 가진 낙제생 같기도 하다. 매우 인상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은 무한한 겸손함의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종교적 급진주의자지만 예수는 교만스럽게 유대교의 기존체제에 완력으로 끼어들었다.

“예수께서는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가 유대교 예배의 심장이요 영혼인 유대 성전에 갔을 때, 그는 감히 책상을 뒤집어 엎으며 비들기 축사를 파괴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들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 마가복음 (11장 15절, 16절)


예수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교만하다. 그는 자신을 “선생이요 주” (요한복음 13장13절)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소자”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목자”요 당신들은 “양’이다 – 그리고 양들은 물론 털을 깎인다 (즉 돈을 빼앗긴다: 역자 주)!

예수의 교만은 실제로 어릴때 부터 시작되었다. 12살 먹은 애를 잊어 버리고 사흘 동안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부모들이 갖을 걱정과 초조함을 상상해 보시라. 성경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예수가 미아가 되었을 때 “슬픔에 잠긴 부모”들이 사흘동안 찾다가 결국 이 소년을 성전에서 찾았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진짜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몰랐느냐며 부모를 나무란다.

“그 부모가 보며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누가복음 (2장 48절-50절)


그러면 왜 교회는 이 자만심 쎈 그들의 영웅에 “겸손”의 탈을 씌워주었을까? 이는 그에게 성스러움, 정의로움, 점잖음, 그리고 온순함이 요구될 때, 그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간단히 먈하면 그는 모든 것의 기준이다, 사자와 같은 표효나, 양 같이 음~매 하고 우는 소리나, 정복의 왕이나 자발적인 희생이나, 이 모든 것들의 기준이다.

당신이 견디어 내야만 했던 그 어떤 고통들도 그가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위탁금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분명히 천국에 가지 않을지라도 성직자들은 당신에게 예수의 장엄한 본보기를 따르도록 시킬 것이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규칙을 지키며, 명령에 순종하고, 겸손하라 - 그리고 불평을랑 생각지도 마라. 네가 죽고나면 그 때 상을 받을 것이다!

 

이교도들이 더 잘 안다

셀수스(Celsus (110-180?))는 쾌락주의파 이성주의자이다. 그는 마술사들과 기독교 협잡꾼들에 대하여 통렬한 비평을 썼다.

“사교집단의 협잡꾼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순진한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코끝으로 그들을 농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선생들도 같은 짓을 한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대하여 이성적 설명을 주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즐겨하는 표현은 “묻지말고 그냥 믿으라” 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지혜는 악이다. 간단한 것이 선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이 말은 오역이었다. 히브리 원 단어는 대들보다: 역자 주)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며 부자들을 비판했다고 듣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풀라톤이 바로 이 생각을 더 순수한 형태로 말한 것을 알고 있다: ‘매우 특별히 선한 사람이 매우 특별히 부유한 부자가 될 수 없다” 어느 말이 더 우리를 고취시킬까?

– 셀수수 (On the True Doctrine)

 

예수는 참을 수 없다

교만은 (사람을) 독선으로 인도하기 마련인데 예수는 자기만족감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예수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 것을 말 할 수 없다. 누구도 그를 속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상대방의 깊은 마음속을 그가 말을 하기 전부터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예지가,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비로운 수락과 일반적인 관용으로 이끌었을까? 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예수는 복수심이 강한 격노로 차 있다. –이는 전도 설교자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태도이다.

그의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장 지독한 저주를 받고 영구한 고통에 들어갈 공짜 입장권을 받게 된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마가복음(3장 29절)

“인자가 그 천사를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장 41절, 42절)


한번 더, 그리고 또, 예수는 겁박하는 제안을 한다. 당근과 채찍을 말한다! 뇌물 아니면 화형 – 무엇이 될까?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요한복음 (15장 6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요한복음 (15장 7절)


예수는 “은혜로 꽉 차있는 존재”여야 한다. 이 이상한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그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단히 좋은 태도라고? 한번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별력 있는 판단을 한다. 당신은 연쇄살인범이나 어린이 성 폭행범과 즐거운 마음으로 맥주룰 마실수 있겠는가? 사담 후세인이나 죠지 부쉬와는 어떤가?

“예수는 대식가요, 술주정뱅이였으며, 세금 징수원의 친구였고 죄인이다. 그는, 다시 말하면, 그 어떤 적절한 구별이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는 명예를 모르고 염치도 몰랐다” -크로산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p. 262)


성직자들의 사용가치 – 높고 힘센 존재, 특히 성직에 있는 사람을 바난하지 말라. 그들이 그들의 바지를 내린채 잡혔을 때는 “은혜”의 시간이다

예수는 “진리로 꽉 찬”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그는 그 자신이 곧 진리라고 말한다. 문제는 예수의 진리는 매일 바뀐다는 사실이다.

성직자들의 사용 가치 –예수는 모든 경우를 위한 인용구를 가지고 있고 그의 모든 선포는 신적인 권위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진정으로 모든 계절의 수퍼맨이다.


예수는 싫증날 정도로 둔하다

많은 경우 예수의 제자들 조차도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혜아릴 길이 없었다. 중세의 교회 교직자들은 이것을 숙고하는데 일생을 보냈지만 아직도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왜 예수는 비유로 말할까?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누가복음(8장 10절)


이 말이 당신을 좌절시키지 못한다면 이 말은 어떤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 복음 (9장 39절)

"He that loveth his life shall lose it; and he that hateth his life in this world shall keep it unto life eternal."
– John 12.25.


예수의 비유는 하찮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예수는 유모어 감각이 없다.

예수는 당신의 발을, 특히 저녁 만찬장에서(에이, 이것 좀 괴상하지 않은가 ?)씻어 줌으로서 겸손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가 당신을 웃게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라. 이 사람은 매우 심각한 사람이다. 문제는 유모어는 장엄한 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기꾼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에게 유모어는 위엄을 갖출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심각함은 근엄함, 그리고 물론, 진리를 암시한다

“예수”는 결코 웃는 일이 없었으며 불행히도 인생은 고안(考案)을 따라한다. 이 또 다른 인간의 내적 충동에 대한 억제는 기독교 정신병학에 상응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즐거운 음악과 감각적인 춤과 함께 웃음은 악마의 술책으로서, 바보들의 축제로서 공공연히 비난되었다. 기독교 세계의 보호소는 어둡고 음침한 무덤이다.

 

이교도들이 더 잘 안다

수사(修辭)학자인 루시안(Lucian (c.125-180))은 기독교를 속기 잘하는 민중들 간에 퍼진 궤변의 한 형태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자살 소동: 역자 주) 기독교/ 견유학파 협잡꾼의 초상을 적나나하게 그려냈다. –이는 그 반향이 그에게 되돌려 진 선전용 사기였다.


페레그리누스는 친부를 목졸라 죽이고 나서 육십이 넘은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견디어 내기 힘들었다…..팔레스타인에서 성직자와 서기관들과 어울리면서 경이로운 기독교의 전승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들 모두를 어린애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사교집단의 지도자였으며 유대회당(시나거그)의 우두머리였고 그리고 그 홀로, 모든 것이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그들의 경전 일부를 해석하고 설명해 주었으며 많은 부분을 써 주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신으로 존경했다….

그가 감옥에 갖혔을 때 기독교인들은 그 사건을 재난으로 간주하고 그를 구출하려는 노력으로 안해본 일이 없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다… 새벽녁부터 늙은 과부와 고아소년들이 감옥의 주변에서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간수를 매수한 후 교직자들이 그의 감옥에서 같이 자는 일도 있었다.

페레그리누스는…이로부터 적지 않은 수입을 벌어드렸다. 정말로 사람들은 아시아의 도시로부터도 왔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영웅을 구출하고 방어해주며 용기를 북돋기 위해, 공금을 모아 보낸 사람들이다.

이 가련한 불행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은 죽지않고 영원히 살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음을 경멸했으며 자발적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경멸했고 자신들을 공동재산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교리를 아무런 증거없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데 능란한 사기꾼이나 속임수 잘 쓰는 자가 그들 가운데 오게되면, 그는 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여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사히 한국에서 돈 잘 버는 목사들의 초상화를 보는 듯 하다: 역자 주).


– 루시안 Lucian of Samosata, The Passing of Peregrinus

 

예수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예수는 두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자에게 뱉어낸 짓궂은 말에서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잘 혼합해 내고 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태복음(15장 22절-26절)

 

예수와 위생: 냄새나는 사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하여 예수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것은 관습이지만 이치에 맞는 관습이다.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15장 1절-11절)


예수는 그의 비평자들을 “위선자”로 비난 한다. 그들 또한 모든 전통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예수는 개인들의 위생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들 가운데 유일하게도 깨끗함(허영)과 목욕(부도덕의 유발)을 반대한다. (이 교리가) 공중 위생에 끼친 피해는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예수는 똑똑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요한복음(11장 9절)

예수-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날조한 -자기기만의 천치- 는 당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그들의 구원자가 영광의 구름을 타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2000년이 지났고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 마태복음 (10장 23절)

“여기 섰는 사람 중에서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 마태복음 (16장 28절)


예수는 더러운 귀신을 쫓을 때 귀신이 일곱 배로 불어날 것을 경고하는 또 다른 특수한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한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 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 마태복음 (12장 43절-45절)


이 괴상한 다산의 생식력을 가진 더러운 귀신 이야기는 ‘일곱 귀신이 나간자’ 막달라 마라아에 대한 누가복음 8장 2절-3절의 주장을 설명해 주는 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자신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로 예수가 뱉은, 의도는 좋았지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나쁜 권고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장 4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마태복음 (5장 39절)


지금 누구를 웃기는가? 이말을 ‘죠지 거듭난 부쉬’에게 말해 보라. 원수를 미워하고,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을 벌주고, 악한자에 응징하는 것은 마치 대낮의 빛 같이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일이다. 예수 자신 조차 자신의 권고를 주의 깊게 따르지 않았고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옥을 가지고 협박을 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니” -마가복음 (16장 16절)


어쨋건, 기독교인들은 실제로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저 땅 보이지? 쳐들어 가서 우리것으로 만들자!”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라”는 속임수 따위에 속지 말라. 이 신비적인 예수 그리스도 조차도 덕의 전형이 아니었다!
(이문제에 대한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비교해 보자. 미묘한 차이도 있고 상당한 차이도 있다 : 공자는 원수를 “더도 덜도 말고 공정하게(정의로) 대하라고 한다. 석가는 보원이자(報怨以慈), 노자는 보원이덕(報怨以德), 공자는 보원이직(報怨以直), 예수는 보원이애(報怨以愛), 볼테르(Voltaire)는 공자의 교훈이 최고라고 격찬했다.: 역자 주)

 

 

Sources:
Jon E. Lewis (Ed.), The New Rights of Man  (Robinson, 2003)
George Long (Trans.), The Meditations of Marcus Aurelius (Collins, 1950)
Michael Parenti, History as Mystery (City Lights, 1999)
Robin Lane Fox, Pagans and Christians (Viking, 1986)
Bruce Metzger, Michael Coogan (Eds) The Oxford Companion to the Bible (Oxford, 1993)
John Boardman (Ed.), The Oxford History of the Classical World (Oxford,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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